서흥김씨 삼강정문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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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에도 유기를 전담하는 국가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의 유기 제작기술은 매우 발달하여 얇고 정교한 유기를 제작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유기 제작기술이 퇴화한 듯하였으나 말기부터 다시 안성유기가 유명해졌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진 유기 제작기법은 납청(納淸)의 방짜유기와 순천(順天)의 반방짜와 안성(安城)의 주물유기가 있다. 안성의 주물(鑄物)유기는 제작기교가매우 발달되어 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합금(合金)이 우수하여 ''안성맞춤''이란 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현재 안성유기의 제작기법을 전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김근수(金根洙) 씨로서 당국에서는 1983년 6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1)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각지붕 목조건물로 1754년(영조 30)에 당시의 명필인 민우수(閔遇洙)의 기문을 받아 건축하였는데, 1958년 고삼저수지 관개공사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서흥김씨 판서공파 종친회에서 관리한다.
임진왜란 당시 김충수가 의병장으로 참여하여 왜병과 접전을 이루다 붙잡히게 되자, 아들 김함은 단신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아버지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함께 순절하였다. 이후 1606년(선조 39) 김함의 효행을 기려 사헌부 지평(持平)을 추증하고 효자정문을 내렸으며, 1700년(숙종 26) 김충수의 충절을 기려 사헌부 장령(掌令)을 추증하고 충신정문을 내렸다. 김함의 손부(孫婦)인 온양정씨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피신하던 도중 적에게 수모를 당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두 딸과 함께 못에 투신자살하였다. 또 김함의 6대손 김익성(金益聖)의 부인 청주한씨는 병든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끝내 숨지자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온양정씨와 청주한씨에게 1740년(영조 16)과 1737년(영조 13)에 각각 열부정문이 내려졌다.(2)
충신 김충수와 그의 아들 함의 효행 및 열녀 두분의 행적을 높이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것으로, 김충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죽산에서 왜군과 접전하다가 적에게 붙잡히자 같이 싸우던 아들함이 부친을 구하고자 적진에 쳐들어가 적을 무찌르다가 부자가 동시에 순절하여 선조 39(1606)년김함의 효절을 기려 효자 정문을 내렸고, 숙종 26년(1700)년 김충수의 충정을 기려 충신 정문을 내렸다.
한편 김함의 손녀인 온양 정씨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이천 거마산으로 피신했으나 적의 추적으로 욕을 면키 어렵게 되자 두 딸과 함께 못에 투신자살하여 정절을 지켰다. 영조 16(1740)년 열녀정문이 내려졌고, 청주 한씨는 영조 7(1731)년에 부군인 익성(益聖)이 위독하여 손가락을 잘라수혈을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임종하니 자식없는 것은 부도(婦道)를 다하지 못함이라하여 부군을 따라 순절하여 영조 13(1737)년 열녀정문이 내려졌다.
<김 충 수( 1549 ∼ 1592 ) >
본관은 서흥(瑞興), 호는 창죽헌(倉竹軒)이며, 죽산부 양지현 월로동(月老洞:현 고삼면 월향리)에서 출생했다. 6세에 서당에서 글을 깨우쳤으며 재주가 뛰어났다. 9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이후 모친 한씨가 종창을 앓았는데 반년이 넘도록 치료를 해도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 의원이 입으로 고름을 핥아내는 것이 즉효라 하자 이를 시행해 효험을 보았다. 이후에도 모친의 봉양에 열과 성을 다해 효자로서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45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조직하고, 죽주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노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에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그의 아들 함(涵)은 적전을 뚫고 부자가 합세하였으나 10월 말경 최후를 맞이 하였다. 숙종 26(1700)년증손 후가 정충(旌忠)의 장계를 올렸으나 조정의 홍혜는 하사되지 않았다. 이후 영조 16(1740)년 5대손 대영(大榮)과 7대손 동현(東賢)이 상계하여 삼강정려(三綱旌閭)를 하사받았고 봉정대부 사헌부장령직에 추증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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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서흥김씨 삼강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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