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30일 금요일

네이버는 한국 기업이 아니었던가?

나는 네이버가 우리나라 기업으로 생각을 했고, 천리안 이후로 좋아했고, 지금까지 사용했다. 처음 생기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러나 이제 버려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한나라의 수장이 형편없다고 해도, 네이버는 한국 기업이 아니었던가? 이번 LINE의 일본에서의 행태를 보고 너무 많이 실망을 했다. 그 동안 네이버 블로그에 나의 생각과 활동을 기록해 왔다. 그것이 아까워 네이버를 버리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네이버 블로그 기록물을 뒤로 하고, 지워버렸다...!!! 네이버는 한국 기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 네이버를 버렷다. I have recorded my thoughts and activities on the Naver blog. It was a waste that I could not throw away Naver, I erased it ... !!! I think Naver is not a Korean company. So now I've discarded Naver.

북한산성 16+1 종주

등산/하이킹
2019. 8. 5. 8:53 AM
소요 시간 10h 26m 23s , 거리 24.2 km
궤적은 밧데리 부족으로 절전모드 사용한 결과입니다.
-작성자 yskim3991, 출처 램블러
날도 더웠고, 들머리를 홍은동에서 시작을 하다보니 시간 소요도 많았고, 시구문, 중성 수문지는 사전에 정보를 얻지 못한 핑계로 그냥 지나쳤습니다.

탕춘대성문 ㅡ 청수동암문 ㅡ 대남문 ㅡ 대성문 ㅡ 보국문 ㅡ 대동문 ㅡ 용암문 ㅡ 백운동암문 ㅡ 북문 ㅡ 서암문 ㅡ 북한산성 정문 ㅡ 음료수 2통 섭취 ㅡ 수문터 ㅡ 중성문 ㅡ 가사당암문 ㅡ 부왕동암문 ㅡ 대서문
          
          
          
          
          
          
          
          
          
          
          
          
          
          
          
          
          
          
          
          
          
          
          
          
          
          
          
          
          
          
          
          
          
          
          
트립의 상세 내용을 보려면 http://rblr.co/00KwY 를 클릭하세요.

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서흥김씨 삼강정문

서흥김씨 삼강정문 설명
우리 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에도 유기를 전담하는 국가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의 유기 제작기술은 매우 발달하여 얇고 정교한 유기를 제작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유기 제작기술이 퇴화한 듯하였으나 말기부터 다시 안성유기가 유명해졌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진 유기 제작기법은 납청(納淸)의 방짜유기와 순천(順天)의 반방짜와 안성(安城)의 주물유기가 있다. 안성의 주물(鑄物)유기는 제작기교가매우 발달되어 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합금(合金)이 우수하여 ''안성맞춤''이란 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현재 안성유기의 제작기법을 전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김근수(金根洙) 씨로서 당국에서는 1983년 6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1)
 
1984년 9월 12일 경기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각지붕 목조건물로 1754년(영조 30)에 당시의 명필인 민우수()의 기문을 받아 건축하였는데, 1958년 고삼저수지 관개공사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서흥김씨 판서공파 종친회에서 관리한다.

임진왜란 당시 김충수가 의병장으로 참여하여 왜병과 접전을 이루다 붙잡히게 되자, 아들 
김함은 단신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아버지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함께 순절하였다. 이후 1606년(선조 39) 김함의 효행을 기려 사헌부 지평()을 추증하고 효자정문을 내렸으며, 1700년(숙종 26) 김충수의 충절을 기려 사헌부 장령()을 추증하고 충신정문을 내렸다.
 
김함의 손부()인 온양정씨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피신하던 도중 적에게 수모를 당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두 딸과 함께 못에 투신자살하였다. 또 김함의 6대손 김익성()의 부인 청주한씨는 병든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끝내 숨지자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온양정씨와 청주한씨에게 1740년(영조 16)과 1737년(영조 13)에 각각 열부정문이 내려졌다.(2)

충신 김충수와 그의 아들 함의 효행 및 열녀 두분의 행적을 높이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것로, 김충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죽산에서 왜군과 접전하다가 적에게 붙잡히자 같이 싸우던 아들함이 부친을 구하고자 적진에 쳐들어가 적을 무찌르다가 부자가 동시에 순절하여  선조 39(1606)년김함의 효절을 기려 효자 정문을 내렸고, 숙종 26년(1700)년 김충수의 충정을 기려 충신 정문을 내렸다.

 한편 김함의 손녀인 온양 정씨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이천 거마산으로 피신했으나 적의 추적으로 욕을 면키 어렵게 되자 두 딸과 함께 못에 투신자살하여 정절을 지켰다. 영조 16(1740)년 열녀정문이 내려졌고, 청주 한씨는 영조 7(1731)년에 부군인 익성(益聖)이 위독하여 손가락을 잘라수혈을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임종하니 자식없는 것은 부도(婦道)를 다하지 못함이라하여 부군을 따라 순절하여 영조 13(1737)년 열녀정문이 내려졌다. 

<김 충 수( 1549 ∼ 1592 ) >
본관은 서흥(瑞興), 호는 창죽헌(倉竹軒)이며, 죽산부 양지현 월로동(月老洞:현 고삼면 월향리)에서 출생했다. 6세에 서당에서 글을 깨우쳤으며 재주가 뛰어났다. 9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이후 모친 한씨가 종창을 앓았는데 반년이 넘도록 치료를 해도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 의원이 입으로 고름을 핥아내는 것이 즉효라 하자 이를 시행해 효험을 보았다. 이후에도 모친의 봉양에 열과 성을 다해 효자로서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45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조직하고, 죽주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노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에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그의 아들 함(涵)은 적전을 뚫고 부자가 합세하였으나 10월 말경 최후를 맞이 하였다. 숙종 26(1700)년증손 후가 정충(旌忠)의 장계를 올렸으나 조정의 홍혜는 하사되지 않았다. 이후 영조 16(1740)년 5대손 대영(大榮)과 7대손 동현(東賢)이 상계하여 삼강정려(三綱旌閭)를 하사받았고 봉정대부 사헌부장령직에 추증되었다.(3)

나의 본

본관: 瑞興 金氏
시조: 김보(金寶)
항렬: 26세
계파: 경기파(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노곡리)

 시조(始祖) : 김보(金寶)

  시조 김보(寶)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보국 대안군(大安君) 평장사 김은열(殷說)의 5세손[또는 8세손]으로 고려 때에 금오위 중랑장(金吾衛中郞將, 고려 때 6위의 하나로 왕도내외를 순찰, 점검하는 관청의 정4품 벼슬)을 지냈다.
  손자인 김천록(天祿)이 상장군(上將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로 서흥군(瑞興郡)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서흥(瑞興)으로 하였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경기파(京機派)
   영남파(嶺南派)
   부호군공파(副護軍公派, 호남파)
   해남파(海南派)
   초계파(草溪派)
 크게 5개파로 분류됩니다.  이외에는 위의 파에서 분파된 것입니다.
 [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김천록(天祿) : 상장군(上將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김세구(世丘) : 김천록의 아들,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김봉환(鳳還) : 1353년(공민왕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김선보(善保) : 봉순대부·판서운관사를 역임하였다.
   김중건(中乾) : 김선보의 큰아들, 조선 세종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김중곤(中坤) : 김선보의 둘째아들,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했다.
   김중인(中寅) : 김선보의 막내아들, 1422년(세종 4)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博士)를 역임하여 이름을 날렸다.
   김효인(孝仁) : 김중곤의 아들,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정의 현감(旌義縣監)을 지내고 1489년(성종 20)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에  올랐다.
   김유(紐) : 세조(世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김굉필(宏弼) :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거두(巨頭).
   김언숙(彦塾) : 김굉필의 큰아들,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지내고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이 뛰어났다.
   김언상(彦庠) : 김굉필의 둘째아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다.
   김언학(彦學) : 김굉필의 막내아들,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올랐다.
   김건(鍵) : 예산현감(禮山縣監), 왕자사부(王子師傅)이다.
   김수열(數列) : 중종(中宗) 때 예조 참판(禮曺參判)을 지냈다
   김익(翌)·김수종(壽悰) :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김선(宣) : 진도 군수(珍島郡守)
   김충수(忠守) :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호조 참판(戶曺參判)에 추증되었다.
   김대진(大振), 김하석(夏錫), 김경(硬) : 학자이다.
   김치곤(致坤) : 순조(純祖) 때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지냈다.
   김대곤(大坤) : 헌종(憲宗)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올랐다.
   김규찬(奎 ) :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김희국(熙國) : 고종(高宗) 때의 흥해 군수(興海郡守)
   김규화(奎華) :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김화식(華植) : 현풍군수(玄風郡守)
   김규충(奎衝) : 봉화 군수(奉化郡守)
   김장권(長權) : 승정원 좌승지(丞政院左承旨)
 [ 본관지 연혁(本貫地沿革) ]
   황해도 서흥군
 [ 집성촌(集姓村) ]
   경남 창녕군 고압면 계상리
   경북 달성군 현풍면 지동
   경북 달성군 유가면 본말동
   경기도 안성군 고삼면 일면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동
   전남 노안면 일원
 [ 항렬표(行列表) ]
 ·경기파(京畿派) - 양지(陽智)
 ·경기파(京畿派) - 숙천(肅川)
 ·영남파(嶺南派) - 장파(長派)
 ·영남파(嶺南派) - 중파(仲派)
 ·영남파(嶺南派) - 계파(季派)
 ·나주파(羅州派, 호남파)
 ·해남파(海南派)
 ·초계파(草溪派)
       위의 내용은 '서흥김씨보감'.

 다른문헌에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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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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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鏞)
용(容)
종(鍾)
순(淳)
재(在)
수(洙)
모(模)
상(相)
형(炯)
열(烈)
      
 [ 인구(人口) ]
   6,098가구, 24,281명. (1985년)
   8,980가구, 28,313명. (2000년 통계청)
 [ 사원 장려  위치 ]
   경현서원  김굉필(宏弼)
   인산서원
   옥천서원
   천곡서원
   도동서원
   이연서원
   화곡서원
   봉암서원
   상현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정려  김충수
   정려  김함
   정려  온양정씨(김배의 처)
   정려  청주한씨(김익성의 처)
 [ 대종회 및 연락처 ]

   전화 : 02-3672-1485